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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 감 • 정 (智・感・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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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TIMENT
정 (情)
IMPRESSION
감 (感)
WISDOM
지 (智)
메이지(明治) 30년(1897), 제2회 백마회 전시에서 <지•감•정>이라는 제목으로 출품된 삼부작입니다. 뒷날 세 그림이 모두 가필되어 메이지 33년 파리만국박람회에 <나부습작(裸婦習作)>으로 출품되어 은상을 받았습니다.



나체화 논쟁
Comments Made by Kuroda
메이지 28년(1895) 4월, 제4회 내국권업박람회가 교토에서 개최되었습니다(장소 : 上京區岡崎町, 시기 : 4월1일~7월31일). 여기에 구로다 세이키는 유학중에 제작한 <조장朝妝(아침화장)>을 출품하여 묘기(妙技) 2등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박람회가 개최되자 이 작품은 나체화(누드)인 점이 문제가 되어 생각치도 못한 파문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공개를 공격한 당시의 여러 신문기사와 투고를 보면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풍기상의 문제를 비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토박람회 회장에 진열된 나체미인은 금후 천하의 일문제가 되려고 한다. 그는 미술가라고 칭하는 사람, 힘을 극히 나체미인을 위해 변호한다. 아아, 어찌하여 추하고 괴이한 것이랴, 이것이 나체화미술의 정수를 나타내는 것인가. (중략) 그들의 나체미인이 과연 미술가의 기량을 나타내는 데 족하다고 한다면 이것을 그리는 것이 반드시 불가하다고 할 수 없었으나, 이것을 공중의 앞에 전시함에 다다라서는 확실히 추하고 괴하다 하겠다. 그들 미술가는 그러한 미술론에 마음을 뺏겨 사회의 풍속에 미치는 영향을 잊어버린 것이다.' (「나체화는 이를 숨겨라」『都新聞』 메이지 28년 5월 11일)

화가들조차 나체화 그리기를 주저하였으며 나체 혹은 나체화에 대한 관헌(官憲)의 단속도 엄격했던 당시, 구로다는 일부러 자작을 공개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나체화를 둘러싼 일본의 양화계나 사회에 대한 도발, 혹은 계몽의식이 강했음을 시사합니다. 다만 이때는 박람회의 심사총장 구키 류이치(九鬼隆一)의 판단으로 공개가 계속될 수 있었으나, 당시 구로다는 구메(久米)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을 뿐이고 교토(京都)에서 침묵했었습니다.

Comments Made by Kuroda
‘아무리 생각해도 나체화를 춘화로 간주하는 구실이 어디에 있겠냐. 세계 보편의 에스테틱은 물론 일본 미술의 장래에 있어서도 나체화를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나쁘기는 커녕 필요하다. 크게 장려해야만 한다. (중략) 지금 다수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뭐라든지 그렇다고 대꾸한 적이 없는 도리상 나는 승리했다. 어쨌든 나는 이 그림과 진퇴를 함께 할 각오이다.‘ (「蹄の痕(1)」, 『光風』3호, 메이지 38년 9월)

그 뒤 구로다는 미술교육을 위한 장소에서는 나체 그리기를 장려하고, <지•감•정>(본 연구소 소장)을 비롯하여 그 후에도 나체화를 전람회에 출품하였습니다. 그러나 작품을 공개하는데 있어서는 관허의 지시에 따라 나체를 모티프로 한 작품만이 특별실에 전시되거나, 나부의 하반신을 천으로 가려서 전시하는 등 우스꽝스러운 사태도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나체화(누드)를 둘러싼 저항과 규제는 그 뒤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수복작업
본 연구소의 소장품 가운데 구로다 세이키의 <지•감•정>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한 나부상 3점으로 구성되었고, 인체에 의한 구의(愚意) 표현을 나타내고자 한 작품이다. 각각의 나부상은 금지(金地)를 배경으로 칠하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이들 금지에 무수의 균열이 생기고 미세하게 들뜬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본격적인 수복이 기다려지고 있다가, 헤이세이 7년(1995)부터 3년 계획으로 한 점씩 복원이 진행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금지배경 균열 원인은 캔버스 바닥칠로 사용했던 아교물의 농도 차이에 의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바닥칠의 도료인 아교물보다 금지층의 아교물이 더 진함으로 인해, 시간이 지나 건조해지자 상층인 금지의 수축이 강해지면서 바닥칠을 들뜬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외에도 캠퍼스가 노화되어 나무틀의 네 모퉁이의 이음이 수축하여 느슨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수복작업은 들떠있는 부분을 어교(魚膠)를 사용한 아교물을 접착재로 하여 신중하게 진행되었으며(1), 인체 부분 등의 박락된 부분에는 제거가 가능한 아크릴계통의 물감으로 색체를 보강하였습니다. 보채가 완료한 후 니스가 도포되었으며, 지지체도 새롭게 만든 나무 틀로 대체하였습니다(2).
(1) fig.1 fig.1
(2) fig.2 fig.2 fig.2

Wisdom Wisdom Impression Impression
< 지 > 수복전 지 > 수복후 < 감 > 수복전 < 감 > 수복후
(수복작업 / 자료제공 : 학교법인 다카자와(高澤)학원 創形 미술학교 수복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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